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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싫고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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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머지 2020. 8. 2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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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싫고 너무 좋다>

한창 색종이 접기에 집중한 5살 아이는 내가 보기에 정말 색종이를 낭비한다. 한두 번 접힌 종이일 뿐인데 아주 소중한 작품이라 생각하며 전시해놓는다. 문제는 이런 작품이 정말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금방 접고 또 새로운 걸 접는다. 그리고 또 새 색종이를 집어 든다. 다 쓰고 나면 또 색종이를 달라고 한다. 나는 금방 새로운 색종이 뭉치를 찾아 건네주지만 사실 마음속엔 너무 낭비 아닌가? 물건을 소중히 아껴 써야 한다고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마음과, 그래 비싼 것도 아닌데 색종이 정도는 마음껏 쓰게 해줘야지 라는 갈등이 치열하다.


시원이 1학년 하교시간에, 실내화 가방에서 실내화를 꺼내 허리 굽혀 가지런히 놓아주면서도, 이런건 혼자 하게 해서 독립심을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마음과, 아니야 내가 데리러 올 땐 이 정도는 애정을 표현해도 되겠지 앞으로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날을 혼자 하교할 텐데. 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후자가 승리한 것이다. 또 나는 지금은 사교육을 안 시키기로 다짐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여러 학원에 다니는 것 보면 불안함을 아예 안 느끼는 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한쪽 마음이 100%여서 선택한 것은 없다. 
 
몇 달 전, 인사만 하고 지내는 같은 동 주민이 못 보던 차에서 내리기에 그냥 인사차 ‘우와~ 차 새로 사셨네요~ 우와~’ 라며 소리 질렀다. 사실 그 차를 자세히 보진 못했다. 분명 흰색 차였는데 회색빛 차로 바뀌어서 알아본 것뿐. 그런데 그분이 부끄러워하며 ‘아유~중고에요. 중고 샀어요.’ 하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 반응에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우와~' 하면서 지나가다 다시 한번 차를 훑었다. 동그라미가 4개 겹쳐있는 로고가 보였다. 아하. 외제 차였군. 그녀도 처음 외제 차를 살 땐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치만 그 마음이 전부인 것도 아닐 것. 그래서 나의 오버에 굳이 중고라며 수줍어했겠지.
 

어른들 마음뿐일까.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 사이에 갈등하다 하나의 마음이 이겨서 이불 속에서 늦장을 부렸을 것이고, 장난감을 꺼내서 놀 땐 분명 다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다가 다 놀고 나면 그 옆의 다른 장난감으로 바로 놀고 싶은 마음이 이겼을 것이다. 또 요새 까칠해진 시원이도 동생이랑 잘 지내고 싶은 마음과 얄미운 마음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이고, 밥을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과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갖고 있다가 나에게 한 소리 듣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때 안 일어나는 아이, 어지르기만 하는 아이, 까칠하게 말하는 아이, 밥 먹을 때 해찰이 심한 아이로 대하며 비난한다.

최근 읽고 있는 매력적인 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서 아주 인상적인 표현을 발견했다.

‘나는 그 애가 조금 싫고 너무 좋다.’

캬. 이렇게 적절한 표현이라니. 아마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을까. 조금 싫고 조금 좋은 것, 조금 싫고 너무 좋은 것, 조금 좋고 너무 싫은 것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사람도, 일도, 어떤 물건도 내가 본 단 하나의 부분만이 그것의 전체가 아니기에, 수많은 부분으로 이루졌기에.

특히 사람을 볼 때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프레임> 책이었던가. 내가 어떤 사람을 몇 번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좀 알 것 같냐 질문 했을 때 거의 한두 번 보면 안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그렇다면 자신을 몇 번 만나야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 것 같냐는 질문엔 훨씬 많은 횟수를 제시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나의 진짜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 생각하겠지.

바로 이 갭이 그 증거이다. 누군가 나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인정하지 못하면서 나는 늘 다른 사람의 부분만 보고 그를 판단한다.


인간은 보통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실은 나 자신이나 남이나 모두 선량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복잡한 존재들이다. <올어바웃 해피니스 271쪽>


풉. 이 문장 읽고 웃음이 터졌다. 너무 기가 막히게 맞는 말이라. 나 또한 단순하게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 또한 그렇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부분일 뿐임을 늘 잊지않길.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부분만 보았기 때문이라는 걸 항상 기억하길.

나아가 나의 부분들도 돌보는 사람이 되길. 나에게 있는 수많은 부분 그대로를 바라 볼 수 있길 바란다. 내가 이런 옹졸한 생각도 하는 구나. 내가 이렇게 배려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네. 내가 이렇게 폭력적인 부분도 가지고 있구나. 이 모든 것이 나 이구나. 라고 인정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좋다 나쁘다 에서 벗어나서 나의 모든 모습을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그래서 나를 조금 싫어하고 너무 좋아하고 싶다. 그럼 그 어떤 타인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 있을텐데. 내 삶이 오천만배는 더 편안해질텐데.

 

그런 날이 오긴...올까...ㅎ


#일간이슬아 #올어바웃해피니스 #프레임
#색종이낭비에이어흰종이낭비까지#그게정말완성된그림인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