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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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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머지 2020. 8. 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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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종종 집에서 영화를 본다. 그럴 때마다 우리집은 디즈니 파와 지브리 파로 갈린다. 한창 공주에 빠져있는 5살 지원이는 항상 <겨울왕국1>, <겨울왕국2>. 남편은 지원이처럼 디즈니 파이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이미 너무 많이 봤고, 나랑 취향이 비슷한 9살 시원인 <이웃집토토로> <벼랑위의 포뇨> <마녀배달부 키키> 중에 하나. 나는 100% 지브리 파이다. 하지만 5세의 주장을 꺾는 건 꽤 힘든 일이라 종종 지곤 한다. 그래서 지원이에게 겨울왕국은 너무 많이 봐서 이제 충전해야해 라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겨우 다른 영화를 보기도 한다. 사실 지브리 파 시원이도 최근에 접한 <모아나>는 또 보고 싶어한다. 근데 나는 모아나도 별로다.  왜 난 겨울왕국 모아나 같은 영화는 안 보고싶고, 토토로 포뇨 키키는 열 번을 넘게 봐도 또 보고 싶을까.

최근 그 이유를 찾았다. 나는 올라프의 유머는 사랑하지만, 왕의 딸로 태어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으리으리한 궁에 살고 있는 주인공에겐 매력을 못 느끼는 것. 태어나고 보니 아빠가 왕인 주인공이, 나라 전체의 위기를 타고난 특별한 힘으로 해결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가 맘에 안든다. 물론 나도 처음 봤을 땐 정말 재미있었고, 영화 자체는 매우 훌륭하고 여러 글을 통해 발견한 철학적 해석들도 놀랍고 좋았다. 그래도 깊은 해석을 스스로 못하는 내 취향은 아니다.

반면에 내가 지브리 파가 된 이유는 넘친다. 나는 메이와 사즈끼가 이사 온 숲 속의 그 낡은 집도 너무 좋고 (토토로가 이웃이라니 꺅), 소스케가 멀리 배 타러 나가신 아빠와 통신할 수 있는 벼랑위의 집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오소노 아줌마가 기꺼이 내 준 먼지 가득한 키키의 방도, 그 빵집도 가보고 싶다.

주인공들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지. 생전 처음 보는 토토로를 용감하게 따라가는 메이도, 비를 맞고 있는 토토로에게 우산을 빌려주는 사즈끼도 정말 멋있다. 심지어 토토로는 숨만 쉬고 있어도 너무 귀엽다. 또 처음 만난 포뇨를 지켜주려고 애쓰는 소스케가 정말 사랑스럽고, 그런 소스케에게 가겠다고 용감하게 집을 나온 포뇨. 거친 파도 위를 신나게 달려와서 만난 소스케를 먼저 꼭 껴안는 신여성 포뇨를 닮고싶다. 어린 나이에 혼자 낯선 마을에 정착한 키키의 용기가 부럽고, 처음 본 빵집 손님의 잃어버린 물건을 대신 가져다주는 키키의 친절함에 반했다. 키키의 사정을 듣고 기꺼이 함께 살자고 이야기한 오소노 아주머니도 존경스럽다.

그뿐인가. 메이가 없어졌을 때 자기 일처럼 돕는 칸타, 칸타의 할머니, 온 마을을 뒤지는 그 마을 사람들, 없어진 메이를 찾아주고 엄마병원까지 데려다준 고양이버스부터 처음보는 포뇨를 망설임 없이 집에 데려와 재워주고, 이상한 기상이변에 갇혀버린 해바라기집 할머니들이 걱정되어 도와주러 가는 소스케 엄마, 키키에게 멋진 간판을 만들어준 오소노 아주머니 남편, 키키와 금방 친구가 되어 힘이 되어준 우르슬라, 그리고 인형인 척 연기하던 지지를 지켜준 그 고마운 개까지.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낯선 타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는구나.

요새 내가 심취한 융 심리학에선, 마음을 빼앗긴 영화 속 캐릭터에게서도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그 모습이 내 안에 있다고. 아직 드러나진 않았지만 분명 나에게 있다고. 그걸 발견하고 연습하면 진짜 그런 나로 살아갈 수 있다고.

....정말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기위해 안전한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직진하는 포뇨,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존재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메이와 사즈끼, 그리고 소스케 엄마와 오소노 아줌마까지.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나에게도 정말 그런 모습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 전과 해 본 후는 상당히 다르다. 늘 두려워하고 거리를 두던 나도 가끔은 용기를 내게 된다. 나한테 진짜 그런 모습이 있을지 모르잖아 라며 평소엔 하지 않던 선택도 한다. 먼저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간관계에서 늘 수동적이던 내가 먼저 전화를 걸고 무언가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함께 하게 된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다. 아직 그게 진짜 나인지, 나한테 또 어떤 모습이 있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진 않지만 앞으로 내 삶에 조금은 변화가 있을 거란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변화를 선물해준 지브리 영화 세 편이 나는 정말 좋다.

#지원아오늘은제발토토로보자
#이웃집토토로 #벼랑위의포뇨 #마녀배달부키키
#융심리학